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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 알렉산드르 예르신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페스트균을 발견한 예르신의 업적과 그 역사적 의미

흑사병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 예르신

1347년, 유럽 전역을 휩쓴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이 병을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렀습니다. 환자들의 손발과 피부가 검게 괴사하며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 재앙으로 당시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했고, 수많은 도시가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사람들은 이 병의 정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신의 분노, 별의 배열, 썩은 공기 같은 설명이 난무했지만, 이 질병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의해 전파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흑사병은 수백 년 동안 공포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카파 포위전과 흑사병의 유럽 유입

흑사병의 유럽 확산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 흑해 연안의 도시 카파(Caffa) 포위전입니다. 카파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페오도시아로, 13세기 후반 제노바 공화국이 건설한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습니다.

1345년, 교역권과 치안을 둘러싼 갈등 끝에 골든 호드의 잔니 벡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카파를 포위합니다. 육로는 차단되었지만, 제노바 상인들은 해상 보급로를 통해 장기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346년 봄, 포위군 내부에서 급성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고, 다수의 몽골 병사가 사망합니다. 이 질병은 오늘날 페스트로 해석됩니다.

이때 피아첸차 출신의 연대기 작가 가브리엘레 데 무시(Gabriele de’ Mussi)는 몽골군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을 투석기로 성 안에 던졌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때문에 카파 포위전은 흔히 “인류 최초의 생물무기 사용 사례”로 언급됩니다. 다만 현대 연구자들 가운데는, 실제로는 벼룩이 기생한 쥐가 성 안팎을 오가며 병을 퍼뜨렸을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견해도 많습니다.

결국 몽골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지만, 이미 카파 내부는 감염된 상태였습니다. 1347년 봄, 제노바 상인들은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메시나, 마르세유, 제노바 등으로 흩어졌고, 선창에 숨어 있던 쥐와 벼룩을 통해 흑사병은 지중해 전역과 유럽 내륙으로 급속히 확산됩니다.

카파는 이렇게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페스트가 유럽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분기점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수백 년의 공백, 그리고 19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뒤에도 오랫동안 이 질병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세균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전까지, 흑사병은 설명 불가능한 재앙이었습니다. 이 미스터리는 무려 약 550년 동안 이어집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흑사병의 실체는 한 사람에 의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르 예르신(Alexandre Yersin)입니다.

예르신, 파스퇴르의 제자

예르신은 1863년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귀화한 의사이자 세균학자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루이 파스퇴르의 제자가 되었고,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당대 최첨단 세균학을 접합니다. 그의 주변에는 에밀 루, 엘리 메치니코프 같은 거물급 과학자들이 있었습니다.

1894년, 홍콩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정부와 파스퇴르 연구소는 예르신을 현장으로 파견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홍콩에서의 결정적 순간

예르신이 홍콩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일본 연구팀이 병원 시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팀을 이끈 인물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Kitasato Shibasaburō)로, 로베르트 코흐의 제자였습니다. 이 상황은 흔히 국가 간 경쟁으로 설명되지만, 실상은 파스퇴르 학파와 코흐 학파 간의 학문적 경쟁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공식 병원 사용이 어려웠던 예르신은 병원 근처의 작은 오두막을 임시 실험실로 삼았습니다. 그는 시신을 매장하던 인부들에게 돈을 주고, 환자의 부풀어 오른 림프절(임파선) 조직을 채취해 연구에 사용했습니다. 반면 기타사토는 주로 혈액에서 원인균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선택의 차이가 결과를 갈랐습니다.

예르신은 현미경 관찰을 통해 편모가 없고 그람 음성인 막대 모양의 균을 발견합니다. 그는 충분한 관찰과 확인을 거쳐 1894년 7월, 해당 균의 특징을 상세히 기술해 프랑스 아카데미에 보고합니다.

이 균이 바로 훗날 Yersinia pestis, 즉 페스트균으로 명명된 미생물입니다.

논쟁과 평가

기타사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원인균을 보고했지만, 그가 기술한 균은 그람 양성균이었고, 이후 폐렴구균으로 판명됩니다. 과학사적으로 재현성과 정확성을 충족한 발견은 예르신의 연구였고, 오늘날 그는 페스트균의 공식 발견자로 기록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독일에서는 기타사토의 기여를 부분적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순수한 과학적 논쟁을 넘어, 학파와 국가, 외교가 얽힌 역사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발견 이후의 길

예르신의 업적은 발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 인도와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페스트 방역과 혈청 연구에 헌신했고, 베트남 나트랑에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해 지역 감염병 연구의 거점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페스트가 벼룩과 설치류를 매개로 전파된다는 사실을 밝혀, 질병의 생태학적 경로를 이해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이는 이후 방역 정책과 공중보건 개념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마무리하며

Yersinia pestis.
이 이름은 수백 년 동안 인류를 공포에 빠뜨렸던 재앙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이 균에 이름을 붙이고, 공포의 대상을 분석 가능한 존재로 바꾼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예르신입니다.

그의 발견은 단순한 학문적 성취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사건이었습니다. 과학은 질병을 없애기 전에 먼저 설명합니다. 예르신은 바로 그 첫 단계를 완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파스퇴르의 말,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라는 문장이 왜 지금까지 회자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레퍼런스

  1. Encyclopaedia Britannica – Black Death
    https://www.britannica.com/event/Black-Death

  2. Encyclopaedia Britannica – Alexandre Yersin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xandre-Yersin

  3. CDC – Plague (Yersinia pestis)
    https://www.cdc.gov/plague/index.html

  4. Gabriele de’ Mussi, Historia de Morbo (카파 포위전 관련 2차 해설)
    https://www.historytoday.com/archive/black-death-greatest-catastrophe-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