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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 항구 공습과 겨자가스, 그리고 항암 화학요법의 출발점

1943년 12월 2일 독일 공군의 바리 항구 기습은 연합군 선박과 항만을 초토화했고, 비밀리에 실린 겨자가스 탄이 누출되면서 의료 대응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과 전시 연구는 이후 질소 머스터드 기반 항암제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폭격 전야: 불이 꺼지지 않던 항구의 불안

1943년 12월 2일 밤, 이탈리아 남부의 바리 항구는 연합군의 물자 수송으로 극도로 혼잡한 상태였습니다. 항구는 24시간 내내 불을 밝힌 채 가동되고 있었고, 선박과 화물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밀집 상태는 그 자체로 이미 취약한 조건이었습니다.

당시 바리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조명과 항구에 집중된 물자는, 공습을 염두에 두었을 때 너무도 눈에 띄는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폭격 며칠 전부터 독일 정찰기들이 바리 상공을 반복적으로 비행하며 항만을 살펴보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독일 공군은 이미 상당 부분 약화되었고, 이렇게 남쪽 깊숙한 지역까지 대규모 공습을 감행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리에는 충분한 방공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인근에 영국 공군 기지도 없었고, 대공포 역시 최소한만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그 평온은 위태로운 균형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 바리 항구에는 미군 수송선 SS 존 하비(SS John Harvey) 호가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연합군이 비상 상황에 대비해 운반한 대량의 겨자가스 폭탄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화물은 최고 수준의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고, 선원들조차 자신들이 무엇을 싣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이 비밀 화물은 바리의 참사를 단순한 폭격 사고가 아닌, 전혀 다른 성격의 재난으로 바꾸게 됩니다.


지옥이 열리다: 공습과 항만의 연쇄 폭발

1943년 12월 2일 저녁 7시 30분경, 바리 항구의 고요는 갑작스러운 폭음으로 깨졌습니다. 독일 공군의 융커스(Junkers) 폭격기 약 50대가 동쪽에서 접근하며 기습 공습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레이더를 교란하기 위해 알루미늄 포일 조각을 대량으로 살포했고, 방어 준비가 미흡했던 항구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초기 폭탄은 항구가 아닌 도심에 떨어졌습니다. 민간 지역이 타격을 받자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고, 많은 이들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항구 쪽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불길하게도, 이 선택은 이후 더 큰 위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잠시 뒤 폭격기들이 목표를 수정하면서 본격적인 공격이 항만에 집중되었습니다. 이미 선박이 밀집해 있던 항구에 폭탄이 쏟아지자 상황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습니다. 배들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피격되었고, 화물선과 수송선들이 차례로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항구에 정박해 있던 약 30척의 화물선 가운데 17척이 침몰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약 34,000톤에 달하는 군수 물자가 바다로 가라앉았고, 그 밖에도 10여 척의 선박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특히 탄약을 싣고 있던 두 척의 선박에서 발생한 폭발은 항만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안의 가솔린 파이프라인이 파열되면서 연료가 바다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불타는 기름은 수면 위를 떠다니며 화염을 확산시켰고, 항구는 거대한 불바다로 변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불붙은 금속 파편이 비처럼 떨어졌고, 폭발의 충격으로 바리 시내 곳곳의 창문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SS 존 하비호의 폭발: 비밀 화물이 만든 ‘죽음의 층’

가장 치명적인 순간은 SS 존 하비호가 직격탄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폭탄이 선체를 관통하자 배는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 났고, 그 충격으로 선내에 실려 있던 액체 형태의 겨자가스가 바다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문제는 그 시점의 항만 환경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선박이 파괴되면서 대량의 기름이 바다 위에 퍼져 있었고, 겨자가스는 이 기름과 섞이며 항구 전역을 덮는 독성의 액체층을 형성했습니다. 여기에 폭발로 인한 열기와 수증기가 더해지면서, 겨자가스 증기는 안개처럼 퍼져 도시 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폭발의 충격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될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다와 공기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화염과 파편을 피해 바다로 뛰어들었던 사람들, 혹은 폭발로 인해 물에 빠진 생존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름과 겨자가스가 뒤섞인 물에 몸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바리의 참사는 단순한 군사적 피해를 넘어, 대규모 화학 재난의 성격을 띠기 시작합니다.


기밀이 만든 공백: 원인을 모른 채 이어진 의료 대응

이 사건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 요소 중 하나는 군사적 기밀 유지였습니다. 연합군 지도부는 독일이 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경우 보복 공격에 나설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리에 겨자가스가 실려 있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졌습니다.

그 결과 현장 의료진은 환자들을 맞이하면서도, 이들이 화학 작용제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화상이나 쇼크 환자로 분류했고, 일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 질환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오염 관리였습니다. 겨자가스에 젖은 옷을 입은 환자들이 그대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의료진은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환자들을 접촉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직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 시기의 대응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벌어진 구조적인 실패로 볼 수 있습니다. 군사적 기밀이 유지되는 동안, 의료 현장에는 결정적인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고, 그 공백은 수많은 생존자들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혼돈 속의 고통: 설명되지 않는 증상들

폭격 다음 날부터 병원에는 이상한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시력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거나, 맥박과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변하는 환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러한 증상은 일반적인 화상이나 쇼크의 양상과는 달랐습니다.

특히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된 이들은 겉보기에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해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중증 화상 환자들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담요와 따뜻한 차를 제공받은 채 오염된 옷을 입고 오랜 시간 대기해야 했습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겨자가스는 피부와 점막을 통해 계속 흡수되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자 환자들은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한 통증과 강한 작열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을 자던 환자들이 통증으로 깨어날 정도였고, 일반적인 쇼크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항구 일대에는 마늘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퍼졌지만, 기름과 연기 냄새에 묻혀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려웠습니다.


‘겨자가스’라는 답: 스튜어트 프랜시스 알렉산더의 도착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투입된 인물이 스튜어트 프랜시스 알렉산더 중령이었습니다. 그는 미군 화학전 전문 의무장교로, 에지우드 화학전 연구소에서 독성 작용제의 생체 영향을 연구한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특유의 마늘 냄새를 맡고 겨자가스를 떠올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환자들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추적했고, 증상이 심각한 이들이 존 하비호 인근에 있었거나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결정적인 단서는 항만에서 수거된 파편 조사에서 나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군이 제조한 M47A1 겨자탄의 파편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화학 작용제 노출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알렉산더는 즉시 의료진에게 상황을 알리고, 격리와 제독 조치를 시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관찰이 남긴 흔적: 백혈구 감소라는 이상한 현상

알렉산더의 관심은 단순한 사고 수습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환자들의 혈액 검사를 통해 공통된 이상 소견을 발견했습니다. 폭격 후 며칠이 지나면서 많은 환자들의 백혈구 수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고, 특히 림프구의 감소가 두드러졌습니다.

이 모습은 그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불과 1년 전, 그는 질소 머스터드를 이용한 동물 실험에서 유사한 현상을 관찰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실험에서는 소량의 질소 머스터드만으로도 실험동물의 백혈구와 림프 조직이 빠르게 파괴되었습니다.

바리에서의 환자 상태는 그 실험 결과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독성이 단순한 파괴를 넘어, 특정 세포를 선택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이 물질이 백혈구를 이렇게 억제한다면, 백혈구가 과도하게 증식하는 병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비극에서 싹튼 생각: 화학요법의 출발점

이 질문은 전쟁이 끝난 뒤 의학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이미 미군은 전시 중 겨자 가스 유도체의 생물학적 효과를 연구하고 있었고, 예일대의 굿맨과 길만은 이 독성을 암 치료에 응용할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동물 실험과 초기 임상시험에서, 겨자 가스 유도체는 림프종과 백혈병에서 일시적이지만 분명한 관해를 유도했습니다. 비록 완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화학 물질이 암을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의학계에 큰 전환점을 남겼습니다.

이후 이러한 연구는 알킬화제 계열 항암제로 발전했고, 현대 화학요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결론: 파괴의 현장에서 시작된 치료의 역사

바리 항구 폭격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비극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전쟁의 파괴 속에서 의학이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기밀 유지가 의료 대응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장의 관찰이 어떻게 새로운 치료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함께 드러냈습니다.

겨자가스는 살상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독성이 남긴 흔적은, 역설적으로 암 치료라는 새로운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리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그렇게 현대 항암 화학요법의 한 축으로 이어졌습니다.

##참고 자료

바라 항구의 이야기는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책에 아주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싯다르타 무케르지. 『암: 만병의 황제(The Emperor of All Maladies)』. 까치,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