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토트렉세이트의 출발점입니다
메토트렉세이트는 오늘날 암 치료뿐 아니라 류마티스 관절염, 건선, 염증성 장질환, 자궁외임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되는 약입니다. 그러나 이 약의 뿌리는 현대 면역학이나 류마티스학이 아니라, 1940년대 후반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소아 급성 백혈병의 현장에 있습니다. 특히 류마티스 관절염에서 메토트렉세이트가 어떻게 효과를 내는지는 아직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약의 탄생 배경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불치병이던 소아 백혈병과 시드니 파버
1940년대 후반의 소아 백혈병은 진단 자체가 사형 선고에 가까운 병이었습니다. 병이 발견되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치료라고 부를 만한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보스턴 어린이병원 병리과 과장이던 시드니 파버(Sidney Farber, 1903–1973) 는 매일같이 어린 환자들의 부검 시편을 다루며 깊은 무력감과 절망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단순히 병을 진단하고 기록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점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1947년, 파버는 자신의 연구 방향을 진단과 사후 분석에서 벗어나, 백혈병을 실제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선택은 이후 항암 화학요법의 역사를 바꾸는 출발점이 됩니다.
엽산에 주목한 파버의 가설
파버가 주목한 것은 골수 세포의 성장과 분열을 조절하는 비타민, 특히 엽산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악성 빈혈이 비타민 B12나 엽산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타민과 혈액 질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파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백혈병 역시 골수 세포의 비정상적 증식에서 비롯되는 병이므로, 이 증식을 지탱하는 성장 인자를 조절하면 병의 진행을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 가설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혈액암은 약물로 치료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비타민과 같은 영양소의 대사를 건드려 암을 치료하겠다는 발상은 전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엽산 투여 실험과 ‘가속 현상’
파버는 자신의 생각을 검증하기 위해 먼저 엽산 자체를 투여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엽산은 하버드 의대 화학자 예라프라가다 수바라오(Yellapragada Subbarow) 가 합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파버의 기대와 정반대였습니다. 엽산을 투여받은 소아 백혈병 환자들에서 병의 진행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고, 증상이 급격히 악화되는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파버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엽산이 악성 빈혈 환자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물질이지만, 백혈병 환자에게는 오히려 암세포의 연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파버는 이 결과를 즉시 발표하며, 엽산 제재는 암 환자 치료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엽산을 ‘차단한다’는 발상의 전환
엽산 투여가 백혈병을 악화시킨다는 관찰은 치료 전략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파버는 엽산을 공급하는 대신, 오히려 엽산의 작용을 방해하면 백혈병 세포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마침 수바라오 연구팀은 엽산과 구조는 유사하지만 기능은 반대로 작용하는 화합물, 즉 엽산 길항제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미노프테린(Aminopterin) 이었습니다.
파버는 이 물질을 확보해, 당시로서는 매우 과감한 선택이었던 임상시험에 착수합니다.
아미노프테린과 첫 번째 관해
1947년 12월, 파버는 백혈병 말기 상태의 8세 소년에게 아미노프테린을 투여했습니다. 이 소년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고열을 겪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지만, 치료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혈액 검사와 임상 증상에서 뚜렷한 호전을 보였습니다. 백혈병 세포 수가 감소하고, 일시적이지만 분명한 관해 상태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경험은 파버에게 큰 확신을 주었고, 그는 이듬해 동료 루이스 다이아몬드(Louis K. Diamond) 와 함께 소아 급성 백혈병 환자 16명을 대상으로 더 체계적인 임상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10명의 환자에서 일시적 완전 관해가 관찰되었습니다. 구강염이나 점막 손상, 출혈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도 동반되었지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소아 백혈병 치료에서 약물로 관해를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파버는 이 결과를 1948년 6월,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발표하며, 화학요법이 소아 백혈병 치료에 사용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공식화했습니다.
논쟁과 희망이 동시에 확산
파버의 논문은 즉각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의사와 연구자들은 혈액암에 약물이 효과를 낸다는 주장 자체를 믿기 어려워하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반면 임상 현장의 소아과 의사들과 환자 가족들은 이 연구에서 분명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파버에게는 치료를 문의하는 편지와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그는 가능한 한 직접 답장을 보내며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아 백혈병을 대상으로 한 화학요법 연구는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파버의 시도는 단일 연구를 넘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지미 펀드와 사회적 후원
파버의 연구는 과학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심도 끌어냈습니다. 1948년, 보스턴 지역의 후원자들은 파버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Children’s Cancer Research Foundation, 훗날 ‘지미 펀드(Jimmy Fund)’로 불리게 되는 조직을 설립했습니다. 같은 해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지미’라는 가명의 어린 암 환자 이야기가 소개되면서 대규모 기부가 모였고, 이 기금은 어린이 암 연구와 치료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후원을 바탕으로 파버는 연구소와 협진 클리닉을 확장했고,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영양사·상담사가 함께 참여하는 종합 치료 모델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파버의 유산과 현대 암 치료
아미노프테린은 이후 독성을 줄인 메토트렉세이트 로 발전했고, 이는 소아 백혈병뿐 아니라 다양한 암과 자가면역질환 치료에 널리 사용되게 됩니다. 파버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단순히 한 가지 약물이 아니라, “암도 약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린이 백혈병의 완치율이 80%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 출발점에는 파버의 집요한 질문과 임상적 용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드니 파버는 1973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을 딴 다나-파버 암 연구소(Dana-Farber Cancer Institute) 와 지미 펀드는 지금도 암 연구와 환자 지원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소아 백혈병 치료의 역사는, 한 병리학자가 엽산이라는 작은 분자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 및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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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ber, S., Diamond, L. K., Mercer, R. D., Sylvester, R. F., & Wolff, J. A. (1948). Temporary remissions in acute leukemia in children produced by folic acid antagonist, 4-aminopteroyl-glutamic acid (aminopterin).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https://pubmed.ncbi.nlm.nih.gov/18860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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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묵케르지(2011).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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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파버 연구소 https://www.dana-farbe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