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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독 – 멸균된 주사 속의 위협

완전히 멸균된 주사제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내독소(LPS) 반응과 면역학적 위험을 실제 사례를 통해 살펴봅니다.

숨겨진 독 – 멸균된 주사 속의 위협

2015년 2월, 호주 시드니의 한 보완의학 클리닉에서 비교적 흔히 시행되던 정맥 주사 시술 후 심각한 이상 반응이 발생했습니다. 41세 여성 환자는 글루타치온과 포스파티딜콜린(phosphatidylcholine)을 포함한 정맥 주사를 맞았고, 이는 한국에서도 흔히 ‘백옥주사’로 알려진 시술과 유사한 형태였습니다.

해당 환자는 이미 라임병, 바르토넬라, 바베시아 감염을 진단받아, 수개월 전부터 주 1회 동일한 주사 치료를 받아오던 중이었습니다. 시술 과정 역시 이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사 시작 후 1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체온은 39.5도까지 상승했고, 혈압은 79/47로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전신 오한과 떨림, 구토와 설사, 복통, 목과 등의 통증이 동반되며 환자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구급차가 출동해 환자는 시드니의 Royal Prince Alfred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생리식염수 4리터가 투여되었음에도 저혈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의료진은 세균성 패혈증을 우선 의심해 광범위 항생제를 투여했고, 동시에 내독소에 의한 전신 염증 반응 증후군(SIRS) 가능성도 감별 진단에 포함시켰습니다.

혈액 및 소변 배양검사는 모두 음성이었지만, 임상 양상이 심각했기 때문에 환자는 총 8일간 입원했고 이 중 5일간 항생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후 상태는 호전되는 듯 보였으나, 입원 17일째에 클로스트리듐 디피실(Clostridium difficile) 관련 설사가 발생했습니다. 분변 검사에서 독소 유전자(tcdB)가 검출되었고, 이는 광범위 항생제 사용에 따른 전형적인 입원성 합병증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집단 발생으로 드러난 단서

입원 중 환자는 같은 클리닉에서 동일한 주사를 맞고 유사한 증상을 경험한 환자들이 여럿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병원은 즉시 지역 보건당국에 이를 보고했고, 조사 결과 동일한 주사제를 투여받은 6명의 환자가 모두 수 시간 이내에 고열, 저혈압, 오한, 두통 등의 급성 반응을 보인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염병 전문가들에게 이 사건은 비교적 명확한 그림을 보였습니다. 임상 양상은 세균 감염보다는 엔도톡신(endotoxin)에 의한 급성 면역 반응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원인은 ‘살아 있는 균’이 아니었다

조사 결과 문제가 된 주사제는 제약사에서 제조된 완제품이 아니라, 약국(compounding pharmacy)에서 글루타치온 분말을 녹여 무균 조제한 제품이었습니다. 이 약국은 사고 발생 약 6주 전부터 총 68개의 조제 주사제를 52명의 환자에게 공급했고, 환자들은 이를 자택에 보관한 뒤 클리닉에서 투여받고 있었습니다.

보건당국은 미사용 상태의 바이알과 조제에 사용된 글루타치온 원료 분말을 회수해 분석했습니다. 검사 결과, 해당 제품들에서 허용 기준을 초과하는 수준의 엔도톡신, 즉 **지질다당류(Lipopolysaccharide, LPS)**가 검출되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살아 있는 세균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세균 자체가 아니라, 사멸한 그람음성균의 외막 성분인 LPS였습니다.

면역계를 폭주시키는 분자, LPS

LPS는 체내에서 Toll-like receptor 4(TLR4)를 통해 면역세포를 강하게 자극합니다. 이 과정에서 TNF-α, IL-6, IL-1β와 같은 염증성 사이토카인이 대량 분비되며, 그 결과 고열, 저혈압, 쇼크와 유사한 전신 반응이 빠르게 유발될 수 있습니다.

보건당국은 이 사건을 “추정 내독소 중독(probable endotoxin poisoning)”으로 분류했습니다. 개별 환자에게 투여된 바이알에서 직접 엔도톡신 수치를 측정하지는 못했지만, 임상 양상과 역학적 연관성은 충분히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어 온 내독소 사고들

이와 유사한 사례는 과거에도 반복되어 왔습니다.

199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겐타마이신 정맥 주사를 맞은 환자들이 수 시간 내에 오한, 고열, 혈압 저하를 겪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해당 주사제는 멸균 및 내독소 기준을 충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체중 대비 고용량 투여로 인해 LPS 총량이 면역계를 과도하게 자극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또한 1996년 브라질 Roraima주 신생아실에서는 정맥 수액 오염으로 인해 다수의 신생아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세균은 검출되지 않았지만, 기준치를 초과한 LPS가 확인되었고, 이는 미성숙한 신생아 면역계를 치명적으로 자극한 원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

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멸균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안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독소, 특히 LPS는 살아 있는 균이 없어도 강력한 면역 반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 분자는 일반인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면역학 연구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핵심 물질이며, 그 위험성과 동시에 학문적 중요성을 함께 지닌 존재입니다.

이 글의 주제가 ‘생활면역’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LPS는 일상과 의료 현장, 그리고 면역 반응의 경계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분자이기 때문입니다.


레퍼런스 (링크 기반)

  1. EBI. The Importance of Controlling Endotoxin Levels in Medical Devices
    https://ebi.bio/the-importance-of-controlling-endotoxin-levels-in-medical-devices/

  2. Johnstone T. et al. Seven cases of probable endotoxin poisoning related to contaminated glutathione infusions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6088536/

  3. John A Kellum et al. The role of endotoxin in septic shock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186/s13054-023-04690-5

  4. Denise O Garrett et al. An outbreak of neonatal deaths in Brazil associated with contaminated intravenous fluids
    https://pubmed.ncbi.nlm.nih.gov/12089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