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으로 전파된 비극
커터사 혈우병 치료제 HIV 오염 사건과 일본 사회의 상처
1950년대 소아마비 백신 사고로 이미 한 차례 큰 상처를 남겼던 커터 연구소(Cutter Laboratories)는, 1980년대에 이르러 의약품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번에는 백신이 아니라 혈우병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던 혈액응고인자 제제였습니다.
이 사건은 특정 기업 하나의 문제를 넘어, 당시 혈액제제 산업 전체가 안고 있던 구조적 위험과 윤리적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평가됩니다.
혈우병 치료와 혈액응고인자 제제의 등장
혈우병은 혈액 응고에 필요한 단백질이 부족해 작은 외상에도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는 유전 질환입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치료는 부족한 응고인자를 외부에서 보충하는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사용되던 응고인자 농축제(factor VIII, IX)는 사람의 혈장에서 추출한 단백질로 만들어졌습니다. 현재의 유전자재조합 기술과 달리, 과거에는 수천 명의 혈액을 한데 모아 정제하는 방식이었고, 단백질이 불안정해 강력한 바이러스 불활화 공정을 적용하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이 방식은 치료 접근성을 크게 높였지만, 동시에 단 한 명의 감염자만 포함되어도 전체 생산 로트가 오염될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HIV 등장과 산업의 대응 실패
1980년대 초반, HIV/AIDS가 새롭게 등장했을 당시만 해도 이 바이러스의 정체와 전파 경로는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혈액을 통해 전파될 가능성은 점차 제기되었지만, 과학적 확증과 제도적 대응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했습니다.
HIV는 비교적 열과 화학 처리에 약한 바이러스였지만, 이 사실이 산업 표준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일부 제약회사들이 위험 신호를 인지한 이후에도, 열처리 등 불활화 공정을 거치지 않은 기존 제품을 계속 유통했다는 점입니다.
커터 연구소는 당시 바이엘(Bayer) 산하 기업으로, 전 세계 혈우병 치료제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전개: 감염의 확산
1982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혈우병 환자들 사이에서 AIDS 발병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경고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혈액제제가 감염 경로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신호였습니다.
이후 미국과 일부 국가에서는 규제가 강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오염 가능성이 있는 제품이 미국 외 지역으로 계속 공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아시아, 중남미, 유럽 일부 국가에서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1984~1985년, HIV 항체 검사 기술이 도입되며 혈액제제의 오염은 명확한 사실로 확인되었지만, 이미 수많은 환자들이 감염된 뒤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1만 명 이상의 혈우병 환자가 HIV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가별 피해 개요
이 사건은 여러 국가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났지만, 공통적으로 혈액 관리 체계의 취약성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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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천 명의 감염자 발생, 이후 대규모 집단소송과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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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건장관 기소, 국가 책임 논의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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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피해 규모와 사회적 파장이 가장 컸던 국가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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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980년대 수입 제품 사용 사실은 확인되나, 상세 기록과 공론화는 제한적
일본: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국가
일본에서는 약 1,800~2,000명의 혈우병 환자가 HIV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당시 전체 혈우병 환자의 상당 부분에 해당합니다. 많은 환자들이 AIDS로 사망했고, 생존자들은 오랜 기간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일본 녹십자(Green Cross) 사건
일본 내 유통 과정의 중심에는 혈액제제 전문 기업이었던 일본 녹십자(Green Cross)가 있었습니다. 이 회사는 커터사를 포함한 해외 제약사 제품을 수입·유통했을 뿐 아니라, 자체 생산 제제에서도 오염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이후 공개된 자료들에 따르면, 일부 위험 신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판매가 계속되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거센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법적 대응과 제도 변화
1989년,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제약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오랜 법적 공방 끝에 1996년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와 함께 보상에 나섰고, 혈액 관리 체계 전반이 개편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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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처리 제제의 의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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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 선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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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검사 도입
등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녹십자와 731부대 논란에 대하여
일본 녹십자의 설립 배경과 관련해, 일부 창립 인사가 과거 일본군 방역 부대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일본 언론과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731부대 출신 인물들이 전후 의료·제약계로 복귀했다는 보다 넓은 역사 논의 속에서 언급됩니다.
다만 이 부분은 사법적으로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문제 제기와 비판의 영역에 해당하며, 혈우병 HIV 사건의 직접 원인과 동일선상에 두고 단정하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건이 남긴 교훈
커터사의 혈액제제 HIV 오염 사건은 제약 산업이 단순한 기술 산업이 아니라, 윤리와 사회적 책임을 함께 요구받는 영역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 비극 이후, 전 세계적으로 혈액제제는 유전자재조합 기술로 전환되었고, 오늘날 같은 대규모 감염 사태는 구조적으로 차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여전히 질문을 남깁니다.
과학이 완전하지 않을 때, 그 위험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그리고 사회는 피해자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백신과 의약품에 대한 신뢰는 성공의 역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실패를 기록하고, 제도를 바꾸며, 책임을 분담해 온 과정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레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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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itute of Medicine, HIV and the Blood Supply: An Analysis of Crisis Decision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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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C, HIV Transmission Through Blood and Blood Produ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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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Ministry of Health, Report on HIV Infection Among Hemophiliacs